2편. 1970~80년대 일본 전자산업은 왜 두려운 상대였을까

 

2편. 1970~80년대 일본 전자산업은 왜 두려운 상대였을까

삼성 앞에 있던 것은 몇 개의 유명 기업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산업 생태계였다

「삼성은 왜 반도체에 뛰어들었을까?」 전체 시리즈

  1. 삼성은 왜 전자산업에 주목했을까

  2. 1970~80년대 일본 전자산업은 왜 두려운 상대였을까

  3. 반도체는 왜 미래 산업의 쌀로 불렸을까

  4. 이병철과 이건희는 왜 반도체를 선택했을까

  5. 삼성은 왜 모두가 위험하다고 한 메모리 반도체에 투자했을까

  6. 반도체 공장은 왜 막대한 돈과 긴 시간을 필요로 했을까

  7. 삼성은 기술과 인재를 어떻게 확보했을까

  8. 불황 속에서도 삼성은 왜 투자를 멈추지 않았을까

  9. 삼성은 어떻게 일본 기업을 따라잡고 세계 시장에 올랐을까

  10. 삼성의 반도체 도전은 한국 산업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1969년 삼성이 전자산업에 들어섰을 때, 일본은 단순히 가까운 선진국이 아니었습니다. 소니·마쓰시타·도시바·샤프·히타치 같은 기업은 이미 라디오와 TV, 녹음기와 계산기, 비디오와 반도체를 만들어 세계 시장에 팔고 있었습니다. 삼성은 일본 제품을 보고 ‘우리도 TV를 만들자’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기업들이 어떻게 기술을 배우고 공장을 돌리며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가를 눈앞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전자산업은 삼성에 배움의 대상이면서도 두려운 상대였습니다. 한국 기업이 제품 하나를 막 만들기 시작할 때, 일본 기업들은 이미 부품·설비·기술자·유통망·수출 시장을 하나로 묶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전자제품을 넘어 ‘전자산업’을 만들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일본의 전자기업은 급성장했습니다. 전후 복구를 거친 일본에는 늘어나는 도시 소비자와 두터운 제조업 기반이 있었습니다. 국민소득이 늘면서 가정마다 라디오, 흑백 TV, 냉장고와 세탁기, 이어 컬러 TV와 오디오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기업은 이 큰 국내 시장에서 먼저 제품을 대량으로 만들고 고치며 품질을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품 하나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TV를 만들려면 브라운관과 회로, 플라스틱과 금속, 모터와 스위치, 측정 장비와 금형이 필요합니다. 일본에는 대기업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부품과 장비를 공급하는 수많은 중소기업과 숙련 노동자, 기술학교와 연구소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한 기업이 새 TV를 내놓으면 부품회사는 더 정확한 부품을 만들고, 공장은 조립 속도를 높이며, 판매점은 소비자의 불만을 다시 기업에 돌려보냈습니다. 이 반복이 몇 년, 몇십 년 쌓이면서 일본은 전자제품을 조립하는 나라가 아니라 전자제품을 더 싸고 안정적으로 대량생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작은 제품에서 배운 정밀함이 큰 시장으로 이어졌다

일본 전자산업의 힘은 거대한 공장만으로 생기지 않았습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카메라, 계산기, 오디오처럼 작고 정밀한 제품을 계속 만들면서 부품을 작게 만들고, 불량을 줄이며, 똑같은 품질을 반복하는 능력을 길렀습니다.

소니의 휴대용 라디오와 워크맨, 샤프의 전자계산기와 액정 기술, 마쓰시타와 JVC의 비디오 기술은 저마다 다른 제품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공통된 능력이 있었습니다. 작은 부품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소비자가 실제로 원하는 형태로 제품을 설계하고, 충분한 물량을 세계 곳곳에 공급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하루아침에 사 오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설계자만 뛰어나도 안 되고, 조립 노동자만 많아도 안 됐습니다. 공장 현장의 개선, 협력사의 납기, 품질 검사 기준, 고장 난 제품을 고치는 서비스망까지 모두 맞물려야 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기업이 일본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은 완성품 한 대가 아니라 그 완성품을 계속 개선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 시장은 일본 기업의 두 번째 공장이었다

일본 기업들은 국내 시장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 일본의 TV·오디오·비디오 제품은 미국과 유럽의 가정으로 빠르게 들어갔습니다. 특히 VCR은 일본 전자산업의 힘을 상징하는 제품이었습니다. 소니의 베타맥스와 JVC·마쓰시타 진영의 VHS가 경쟁했고, 일본 기업들은 규격 싸움과 생산 경쟁, 해외 판매망 경쟁을 동시에 벌였습니다.

1980년대 일본에서 생산된 VTR 가운데 80% 이상이 해외로 수출될 만큼 비디오 산업은 수출산업이 되었습니다. 마쓰시타는 1983년까지 VCR 1천만 대를 생산했습니다. 이 숫자는 한 제품의 인기를 보여 주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대규모 생산, 부품 조달, 국제 유통, 표준 경쟁을 한꺼번에 해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신생 전자기업에는 냉정한 장면이었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일본 제품은 이미 ‘품질이 좋고 고장이 적은 제품’이라는 신뢰를 얻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들어온 기업은 일본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거나, 적어도 비슷한 품질을 더 낮은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했습니다. 단순 조립만으로는 넘기 어려운 벽이었습니다.

반도체에서도 일본은 미국을 추격하고 있었다

일본 전자산업이 더 두려웠던 이유는 가전제품만 강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일본 기업들은 전자제품을 만들며 쌓은 생산관리와 정밀가공 능력을 반도체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와 기업, 대학과 연구기관도 대규모 집적회로 개발을 중요한 과제로 보았습니다.

반도체는 한 번 설계해 놓고 끝나는 산업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회로를 웨이퍼 위에 반복해서 새기고, 불량을 줄이고, 공정을 안정시키는 능력이 핵심입니다. 일본 기업들이 강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것을 수천만 개, 수억 개 만들어도 품질을 유지하는 능력’이었습니다. TV와 오디오에서 단련한 제조의 감각이 메모리 반도체 공정과 만난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 일본 기업들은 세계 DRAM 시장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 반도체가 너무 빠르게 시장을 넓힌다는 위기감이 커져 무역 갈등으로까지 번졌습니다. 반도체의 본고장인 미국이 일본을 경계할 정도였으니, 이제 막 전자산업의 경험을 쌓던 삼성에게 일본은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이미 앞서 달리고 있는 거대한 기준이었습니다.

‘일본을 배운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삼성은 일본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TV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그 선택은 기술을 들여오고 공장을 배우기 위한 현실적인 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협력은 곧 의존의 문제도 낳습니다. 핵심 부품과 설비, 설계와 생산 방식이 모두 상대에게 묶여 있으면, 기업은 영원히 뒤따르는 조립업체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성에 일본을 배운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제품과 공장, 품질관리에서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언젠가는 일본에서 사 오던 부품과 기술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반도체로 이어집니다. 전자제품의 핵심 부품을 남에게 계속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가장 어렵고 위험한 부품부터 직접 만들 것인가. 일본 전자산업의 힘은 삼성에게 큰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삼성이 왜 반도체라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려 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가장 강한 자극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당시 많은 사람이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고 부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반도체는 왜 수많은 전자제품 안에 들어갔고, 왜 한 나라의 산업 경쟁력까지 좌우하는 부품이 되었을까요?


글을 위한 참고 자료

  • 일본 반도체역사관, 「1980년대 업계 동향」

  • 일본 경제산업성, 「초LSI 기술연구개발조합」 관련 자료

  • Panasonic Group History, VHS·VCR 생산 연혁

  • 일본 지적재산연구교육재단, 「전후 일본의 혁신 100선: 가정용 비디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도쿄 행정 구역(간략한 정리) [행정 구역, 시리즈 1]

중국의 뉴욕, 중국 근대사의 아픔을 품은 상하이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도시 역사 시리즈 3]

도쿄 23구 지도(구시가지 행정구역)[행정 구역 시리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