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뉴욕, 중국 근대사의 아픔을 품은 상하이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상하이는 누구나 한번쯤 가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도시이지요. 마치 누구나 뉴욕은 평생 한번이라도 가가보고 싶은 도시인것처럼 중국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상하이의 도시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곳입니다. 

아마도 상하이가 그런 매력을 갖게 된 것은 중국의 근현대화 과정의 역사적 소용돌이 때문이겠지요. 한국의 임시정부도 상하이에 있었으니깐요.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상하이는 1842년 난진조약으로 이어지는 개항을 맞이하면서 도시의 운명이 급격히 변한 경우입니다. 영국이 중국과 무역을 위해 아편전쟁(1842)을 치르고 난징 조약으로 상하이의 문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운명의 조계를 설치하게 됩니다. 

조계라는 것은 중국의 영토이지만 중국의 주권 밖에 운영되는 치외법권 도시를 말하는 것으로 홍콩과 비슷한 것이지요. 이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에는 서양의 자본이 은행과 무역회사를 통하여 진출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중국 내륙의 부와 인구 그리고 늘 그렇듯이 정보가 상하이로 몰리게 되고 상하이는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상하이는 동양의 파리 동양의 뉴욕이라 불리울 정도의 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가 됩니다. 특히 금융과 무역이 발달하였고 이로 인해 언론도 발전하고 영화와 재즈도 발전하였습니다. 당연히 마약과 조직폭력 단체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도시처럼 혼합된 문명의 도시가 되었지요. 심지어 중국 공산당 1차 당대회(1921)도 상하이에게 개최 됩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인 사회주의 체제가 시작되면서 외국자본은 철수 하고 금융과 상업기능이 사라지게 되고 국가 공업도시로 재편되게 됩니다. 상하이에서 발생하는 세금은 베이징으로 흘러가게 되고 도시는 경제적 희생양이 되게 됩니다. 1950-70년대에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큰 타격을 받고 국제도시의 모습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1990년 덩샤오핑이 푸동 개발을 선언하고 상하이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엔진이 되게 되지요. 다시 금융-무역-IT 중심지(푸동)이 됩니다. 세계 최대의 항만이 만들어지고 글로벌 금융 허지를 유치하고 초고층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은 중국의 가장 큰 항구가 만들어졌고 중국의 해외를 향한 관문이 되어 버린 도시입니다. 

상하이는 중국이 세계를 처음 만난도시이고 가장 아프게 중국의 근대화를 겪었으며 다시 세계를 향한 주도권을 쥐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상하이는 gpt가 추언하는 글쓰기 좋은 도시 생활을 느끼기 좋은 도시입니다. 그 이유는 상하이는 역사적인 도시의 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모양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근대 문화 개인의 문화 자본주의 문화가 서로 공존하는 곳입니다. 특히 프랑스 조계는 도쿄보다 더 서정적이고 베이징보다 휠씬 자유로운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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